
제목에 내세운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개념과 현대 경제학 이론의 기반을 형성하는 '경제적 인간'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것이 이 책에서 가장 주요한 내용입니다. 경제학의 오만함에 대한 지적이지요. 이 경제적 인간이라는 개념에 가정 노동이 포함되지 않음을 지적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자면 가사나 아이돌보기 같은 것들이요.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경제학에서 취급하지 않는 내용 말입니다.
페미니즘 책을 읽으면 화가 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지워졌구나, 이런 방식으로 여자는 인간의 표준에 포함되지 못했구나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납니다. 모르지는 않았었는데, 이렇게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들어놓으면 좀 더 화가 나네요.
일상어로 쓰여 있고, 각주의 수가 적어서 현대 경제학의 어떤 점이 문제가 되고 있는가가 궁금하신 분이라면 읽어보실만 합니다. 저자가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에 페미니즘적인 부분이 있지만 책의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은 아니며, 그보다는 남자들의 오만이 경제학이 얼마나 현실과 분리되어 있으며 가정 노동의 간과로 인하여 어떤 부정확성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지적하는 책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식탁에 앉았을 때 푸줏간 주인과 빵집 주인이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어서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바로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교환을 통해 충족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애덤 스미스의 저녁 식사가 식탁에 오른 것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스테이크를 실제로 구운 것은 누구였을까?
애덤 스미스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이 경제학의 아버지는 거의 평생을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가 지안일을 돌봤고, 사촌이 돈 관리를 했다. 애덤 스미스가 관세 위원으로 에든버러에서 일을 하게 되자 어머니도 함께 이사했다. 그의 어머니는 평생 아들을 돌봈지만, 저녁 식사가 어떻게 식탁에 오르는지를 논할 때 애덤 스미스가 언급하지 않고 넘어간 부분에 속해 있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집필할 당시 푸줏간 주인, 빵집 주인, 양조장 주인이 일하러 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부인, 어머니, 혹은 누이들이 하루 종일 아이들을 돌보고,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고, 빨래하고, 눈물을 훔치고, 이웃과 실랑이를 해야 했다. 어떤 식으로 시장을 바라봐도 그것은 또 하나의 경제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가 거의 이야기 하지 않는 경제 말이다.
매일 아침 15킬로미터를 걸어가서 식구들에게 필요한 땔감을 모아 오는 11세 소녀는 국가의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한 나라의 총 경제 활동을 측정하는 GDP를 계산할 때 그녀는 포함되지 않는다. 경제 성장에도 중요하지 않다. 아이를 낳아 기르고, 정원을 가꾸고, 형제자매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고, 집에서 기르는 소의 젖을 짜고, 친척들의 옷을 만들고,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쓸 수 있도록 돌보는 일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 활동 중 어떤 것도 주류 경제학 모델의 '생산 활동'에 포함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보이지 않는 성이 있다.30쪽~ 31쪽
덧글
여성 경제학자라고 해도 저렇게 거래로 이루어지지 않은 생산적 행위에 대해서 딱 부러지는 수치적 값을 내놓기는 쉽지가 않을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여권 신장은 여성의 노동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형태로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점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래되지 않는 노동을 신성시하기만 하는 것은 여성의 권리 향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아요.
오히려 "어머니"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나찌새끼들이 좋아하는 발상이잖아요 그거.
또한 여성의 노동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게 가사 노동을 주로 여성이 했을 뿐,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 또한 모두들 가사 노동을 분담하고 있다고 봐야합니다. 그런데 이걸 경시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혼자 사는 사람의 노동 시간이 너무 길어요. 혼자 산다고 하면 야근 많이 하겠거니 하고요..
그런 점에서 가사 노동을 반드시 비용으로 명시를 해야 하는 거죠. 이 책은 인간이 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가사 노동을 경시한 결과로 인간의 삶이 피폐해진 것을 지적하는 책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사 노동을 여성이 많이 했을 뿐이고요.
하지만 말씀하신대로 중시...를 한다고 해봤자 주둥아리로만 하는게 아니라 실질적인 리워드가 있어야 되는데 국가에서 가사노동 수당(??) 같은걸 주는 수 밖에 없거든요. 그리고 사회의 체계는 이런 식의 수당 받아먹고 사는 사람에게 사회적 권리의 가중치를 주진 않는다는게 문제가 되죠. 일단 가사노동해서 국가수당 받는다 치면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에서 소외당하니까요. 그러니 남자고 여자고 다들 바득바득 이를 갈며 바깥으로만 나가서 일 할려고 하는거고요.
사실 20세기 공산국가에서는 이에 대한 꽤나 합리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다고 생각해요. 그냥 여성을 모조리 직장으로 불러모은다음 가사노동은 거의 전부 외주화시켜버린거죠. 밥이나 육아에서부터 시작해서 다른 여러 가사노동까지 이걸 업으로 삼는 전문가에게 집약시켜버리고 그렇게 해서 가사노동을 사회화 해버린거죠.
어쨌든 여성의 노동은 시장으로 최대한 나와야됩니다. 그래야 여성의 권리도 더욱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가사노동을 신성시하는건 그냥 퇴행이에요.
궁극적으로 가사 및 돌봄 노동의 문제는 가사 및 돌봄 노동이라는 자체보다는 가사 및 돌봄 노동을 우습게 보고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 결국은 필요로하게 되는 서비스재임에도 말이지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먹고, 자고(잘 곳을 관리하고), 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 평가해야만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거지요. 누군가에게 통째로 맡기지 않고, 잘 분담하고, 또 먹고, 자고, 쉬는 것을 보장할 수 있는 넉넉한 시간이 있어야 하고요, 그것을 당연히 기업이 져야 하는 부담으로 받아들여야만 변화가 발생할 수 있지요.
예컨대 독신자라고 하면 가사 노동에 거의 시간을 안 쓸 것이므로 야근을 많이 시킬 수 있다 -> 이것도 충분히 문제거든요. 현대 사회가 혼자서는 의식주를 고품질로 꾸려나갈 수 없는 남자를 너무 많이 양산했고요. 그런 이유로 의식주의 고품질을 여성에게서 기대하는 문제가 발생한 거고요. 자신의 의식주를 가꾸기 위해서 시간을 들이고 비용을 쓰는 것이 사회에서 중요하고 필수적인 일로 받아들여야만 제대로된 경제체제를 바라볼 수 있는 거죠.
현재 경제학의 논리대로라면 회사가 가장 잘하는 행동은 직원이 지쳐서 사리 판단을 못하게 되어 자살할 때까지 뼛골까지 뽑아 먹고 상하면 버리는게 베스트 오브 베스트인데, 그럼 무얼 위한 경제학인가 하는 것이죠.
하긴 페미니즘의 주장은 페미니스트들의 숫자만큼이나 제각각이니 님처럼 말씀하실 수도 있겠네요.
같은 스펙으로 여자이름을 쓰는 경우 명백하게 불평등한 평가를 받는 것은 이미 많이 연구된 사항이죠.
한국의 경우에는 70년대 수출의 절반 이상을 여성 노동이 담당했음에도 간과되고 있고, 간호사의 노동이 가치 폄하 되는 현상 등 많은 내용을 다루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