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볼루셔너리 로드

1월께에 랑야방을 시청한 이후로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래 끌어온 책 한 권을 드디어 끝냈습니다. 그 밖에 재봉을 하면서 헬로월드의 책 몇 권도 TTS 기능을 이용해서 읽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차차 하도록 할게요.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한 3년쯤 전인가, 4년쯤 전인가 적절한 가격으로 중고책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구매한 책입니다. 지금은 절판되었더군요. 영화가 아주 잘나왔다는 평을 들었으나, 아직까지 보진 못했습니다.

영화가 나왔기 때문에 유명한 작가인가 했더니, 역으로 이 영화 덕분에 대중들에게 빛을 본 작가인가 봅니다. "작가들의 작가"라는 평이 있다고 하는데, 읽어보면 왜 그런지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책을 비교적 많이 읽는 것에 비하면 책을 쓰는 기법, 테크닉을 보는 눈은 무지에 가깝습니다. 점점 더 책을 깊게 읽게 되고, 트위터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배우면서 전보다 책을 잘 읽을 수 있게 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그런 저에게도 이 책은 정말 명확합니다. 리처드 예이츠의 필력은 그림으로 따지면 하이퍼리얼리즘에 가깝습니다. 모든 것을 구석구석 인내심을 가지고 빠뜨리지 않고, 묘사합니다.

에이프릴이 집 안에서 남편과 이야기 하기 전 가루 세제를 꺼내 섞고, 창 밖으로 아이들을 흘긋 보고, 청소솔을 꺼내고, 바닥을 문지르는 것. 프랭크가 직장에서 상사의 눈치를 흘긋 보고, 상사를 비평하고, 같은 사무실의 여자들을 평가하고, 쓸데 없는 방법으로 시간을 죽이는 것. 어느 것 하나 소홀함 없이 묘사합니다.

여주인공을 맡은 젊은 여성의 이름은 에이프릴 휠러였다. 그녀가 등장하여 무대 위를 가로지르자 "사랑스러워"라는 속삭임이 강당 전체에 퍼져 나갔다. 기대에 부푼 나머지 상대방을 팔꿈치로 콕콕 찌르면서 "잘하는데"라고 속살대는 소리가 뒤따랐다. 여주인공이 10년도 채 안 된 과거에 뉴욕의 일류 연극학교에 다녔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몇몇 사람은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스물아홉 살의 그녀는 귀족적인 아름다움을 풍기며, 큰 키에 은빛이 도는 금발의 미인이었다. 아마추어 조명일지언정 그녀의 뛰어난 미모를 일그러뜨릴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이상적인 배역 같았다. 두 아이를 출산하느라 엉덩이와 넓적다리 주위에 살이 오른 흔적마저 아무 상관 없었다. 그녀의 자태는 수줍고 육감적인 처녀 같았기 때문이다. 둥그스름한 얼굴에 지적으로 보이는 젊은이로 객석 맨 뒷줄에 앉아 주먹을 깨물고 있는 프랭크 휠러를 어쩌다 슬쩍 본 사람이라면 그가 이 여주인공의 남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청혼자 같다고 말했을 것이다.
19쪽-20쪽

인파를 헤치고 나아가는 몇 안 되는 사람들 틈에 프랭클린 H. 휠러가 끼어 있었다. 그는 사죄하듯 천천히, 그리고 자기 모습이 위엄 있어 보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연방 "실례합니다, 실례합니다"라고 말하며 옆걸음으로 가만가만 걸어서 복도를 따라 무대의 문 쪽으로 다가갔다. 아는 사람 몇몇과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보냈다. 한쪽 손은 주머니에 감추듯 찔러 넣고서 연극이 공연되는 내내 빨고 물어뜯던 축축한 주먹을 말렸다.
그는 말쑥하고 건장했다. 며칠만 지나면 서른 살이 될 터였다. 검은색 머리카락은 짧게 깎았고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만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광고 사진가들이 품질은 좋은데도 가격이 저렴한 상품 광고를 만들 때 쓸 만한, 분별력 있는 소비자 모델(뭣하러 더 씁니까?) 같은 인상이었다. 눈길을 끌 만큼 개성적인 면이 없는 몸매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는 평범하지 않은 변덕이나 들뜬 마음같은 게 어렸다. 표정을 살짝만 바꾸어도 한순간에 전혀 다른 성품이 드러날 만했다. (하략)
26쪽-27쪽

기발함보다는 성실함으로 느리고 꼼꼼하게 묘사하는 이 책은 읽기 편하지도 않고 재미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틀림없이 재미있는 책은 아닙니다. 하지만 훌륭하고, 아름답고, 충분히 읽어볼만한 책임은 보장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물은 공평하게 단점을 가지고 있고, 오판하고, 공평하게 그 대가를 받습니다. 오판의 뒷면에는 우리가 늘 직면하지만 직면하고 싶지 않아서 뒤로 미뤄놓는 것들이 있지요. 더 이상 미룰 수도 없을 때에도 '언젠가는'을 기약하게 만드는 꿈, 이상향 같은 것들요. 그것을 단 한 번의 회피도 없이 꼼꼼하게 그려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는지 압니다. 하지만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달라서, 똑같이 쓸 수는 없을 거에요. 하이퍼리얼리즘 그림들이 때때로 그러하듯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꼼꼼하게 사진으로 찍어 보여주지만 여전히 결과물은 믿을 수 없게 섬세하고 또, 과연 그렇게까지 해서 이 그림을 그려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번역 또한 좋습니다. 오역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문장은 탄탄하고 작가의 원문을 윤색했으리라는 의심은 들지 않습니다. 역자 본인이 글을 쓰는 일을 잘 안다는 인상이에요. 모처럼 안심하고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에이프릴이 주부로서의 할 일들을 해내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한 빛나는 세간 살림을 묘사하는 부분입니다. 1961년에 처음 출판된, 1926년생의 작가가 반짝이는 식기들, 깨끗한 거실이 저절로 이뤄진 것이 아님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부분은 묘하게 감동을 줍니다. 제게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틴케이스에 든 가루세제 같은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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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그림자 : 별도 없는 한밤에 2016-02-22 18:44:18 #

    ... 땀한땀 쌓는 과정이 정성스러워서 읽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최근에 본 중에서 "어떻게 이렇게 쓰지?" 라고 생각한 책이 몇 권 있었지요. 하나가 《히페리온》 다른 하나는 《레볼루셔너리 로드》였어요. 여기에 《별도 없는 한밤에》를 얹겠습니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그림으로 치자면 하이퍼리얼리즘 같습니다. 무엇을 썼는지는 상당히 선명하지만 어떻게 쓰는지 비전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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