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의 모험

저는 책을 신중하게 선택하는 편이 아닙니다. 저의 독서는 일년에 많아야 60권 정도로, 적게 읽는다고 말하기도 난처하지만 독서가를 자처하기에도 많은 양은 아니에요. 장르를 좋아하는 독자에게 이 정도 독서량이면 신간을 채워 넣는 것만으로도 책장을 채우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쪽 책을 고르는 정보력은 영 떨어집니다. 어지간한 SF 작가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일본 추리소설가라면 어떤어떤 작가들이 잘 나가는지도 압니다. 어떤 일본어 번역가가 책을 괜찮게 번역하는지, 최근 어떤 만화책이 유행하는지도 완벽하진 않더라도 꿰고 있습니다만 거기서 벗어나면 일반 독자와 다를 바가 없어집니다.

이 책은 표지가 근사하고 제목도 멋집니다. 많은 대형 서점에 문구점이 입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독서가들은 문구류에도 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요. 문구에 대한 책이라니! 멋지지 않습니까? 고민할 것도 없이 사은품을 받기 위해 장바구니에 담아야 하는 최신간으로 이 책을 선택했습니다.

좀 더 신중했어야 했어요. 이런 제목을 달고 있는 책이지만 저자가 영국인이라는 것만 살펴 보았어도 좀 더 재밌는 독서를 할 수 있었을거에요. 책을 잘못 썼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생각한 것과 달랐을 뿐이에요.

이 책의 표지로 미루어 보아 꽤 많은 삽화가 들어 있을 것 같지만...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자는 저와 나이가 비슷한 영국인으로, 그가 써온 문구와 감수성은 저와 꽤 다릅니다. 이 책은 꽤 섬세하게 문구류가 발명된 과정, 시장에 안착하기까지의 모험을 충실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멀게는 이집트(종이 부분)시대부터 문구류가 급격하게 발달한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에 대한 이미지는 아무래도 한국인과 영국인에게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꽤 오래되어서 영국인들조차 상상할 수 없는 문구류에 대해서는 삽화를 제공하고 있지만, UHU 접착제라든가 스윙라인 빨간색 스테이플러 같은 건...잘 알 수 있는 한국인이 드물겠죠. 서류 상자부분에 가서는 "아! 나도 그거 알아! 울트론이 해킹해서 어벤져스들이 서류를 뒤져서 정보를 찾아야 했을 때 나온 그 상자 말이지?"라고 해야할 지경입니다.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추억을 공유하기에 우리의 몸과 마음은 비행기로 12시간쯤 떨어져 있어요. 입국 절차와 런던 도심으로 들어가는 시간을 포함하면 2시간쯤 더 걸릴테고, 저자가 런던 중심부에 살고 있지 않다면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요.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아! 나도 이거 알아! 라고 할 수 있었던 부분은 대일본문구사가 펠트펜을 개발했고, 사인을 하기에 좋았으므로 '사인펜'이라고 불렀다는 부분, 그리고 대일본문구사는 나중에 이름을 바꾸어 펜텔Pentel이 된다는 부분과 스테이플러의 영속성에 대한 부분을 다루었을 때였어요. 이 부분은 아주 좋았습니다.

스테이플러는 상당한 존재감을 가진 물건이다. 감정적으로 집착하는 이유 중에는 분명 그것도 있다. 금속제 팔과 용수철로 되어 있으니, 그 주위에 널린 다른 물건들보다 더 오래 존재한다(스테이플러를 새로 사기까지 걸리는 시간보다 컴퓨터를 교체하는 기간이 더 짧은 회사도 있을 것이다). 사실 사무실 근무자가 쓰는 다른 문구류보다 더 오래 존재할 뿐만 아니라 사무실 근무자 자신보다도 더 오래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근무자들은 다른 직장으로 이동하겠지만 스테이플러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문구류 캐비닛에 도로 들어가 새 사용자를 기다리고 새로운 관계를 준비하면서. 그런데 가끔은 그 관계가 너무 강해져서 계약을 간단하게 종료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2011년 렉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최근 경제 불황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쓰던 스테이플러를 집으로 가져가는 일이 많다. 자신들의 개인 소지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구의 모험》312쪽

금속으로 만든 튼튼한 호치키스들은 좀처럼 고장나지 않고, 다른 물건들과 달리 잘 분실되지도 않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찾아다니면 누군가 반드시 행방을 알려주더라고요. 재밌는 물건이죠.

위 문단은 제가 22년쯤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린 호치키스에 대한 추억을 떠오르게 해주었어요. 제가 처음으로 가졌던 호치키스는 빵집에서 판촉물로 준 것이었습니다. 노란색 플라스틱 몸체에 핀을 밀어내는 날을 젖히면 완전히 네모지게 접을 수 있었어요. 홍보문구는 다른 색소가 전혀 섞이지 않은 것 같은 순수한 초록색이었습니다. 내가 대학생일 때도 필통에 들어 있던 그 물건은 어느날 필통과 함께 잃어버렸어요. 비슷한 때에 잃어버린 엄마의 금 귀걸이와 5년 이상 쓴 샤프 같은 것들이 떠 오르네요. 역시 문구류는 이상한 매력이 있어요.

같은 소재라면 일본인이나 한국인이 쓴 것을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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