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대한 감상은 아마 노트에 써 놓고서는 잊어 버렸습니다. 《식인문화의 수수께끼》에서 레닌그라드 포위공격 때 있었던 카니발리즘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썼었나? 하고 생각했죠. 확인해 보니까 에버노트에는 없었습니다.

무슨 생각을 했냐하면요, 너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2차 세계대전은 그렇게까지 오래 전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2차 세계대전에 휘말렸던 사람들이 지금 전세계의 노인을 구성하고 있는 거에요. 안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믿는 나라들 대부분은 2차 세계대전으로 심각한 상처를 입었던 겁니다. 대중 문화가 꽤 화려했던 70년대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고작 35년 밖에 지나지 않았고, 제가 태어난 80년대라고 해도 겨우 45년 밖에 안 지났던 거죠. 아마 병사로 참가한 사람 중 많은 사람들이 70살도 안 되었을 겁니다.

또 다른 생각을 해 보죠.

65살의 한 백인 남성을 생각해 보세요. 부유함이 넘쳐나던 80년대에 그 남자의 자식들은 자본주의의 찬란함 속에 자리 잡았습니다. 아직 모기지론 붕괴도 없었고, 대량 해고 사태도 심하지 않았습니다.

잿더미에서 세계를 되살려낸 부모 밑에서 자라나 풍요로운 80년대를 살고있는 20대와 30대 남자요. 아버지는 성실했고, 상처를 딛고 일어나 자수성가 했습니다. 아버지의 고통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나고 비인간적인 것이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대단했냐면 대부분의 정부수반들이 더 이상 세계적인 규모의 전쟁을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할 정도의 사건이었어요. 그것을 이겨낸 자랑스러운 아버지와 아버지를 닮은 아들입니다.


이것이《쥐》가 다루는 내용입니다. 저는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운 좋게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습니다. 이번 설에 본가에 내려갔더니 동생이 가지고 있어서 이번 기회에 다시 읽었습니다. 긴 책을 읽을 정신적인 여력이 없었기에 만화인 쥐를 선택했습니다. 어릴 적에 읽었던 책을 나이 먹어서 다시 읽게 되는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쥐》로 그려지는 유대인이 아우슈비츠에서 고생한 이야기였어요. 이번에 다시 보니 그런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만화로 그리는 만화가 아들과 전쟁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버지의 세대 갈등이 더 중요한 이야기였습니다. 합본판으로 나오고 또 개정판이 나오면서 어느 정도의 수정은 있었던 것 같지만 어느 정도 변화가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아버지는 폴란드에서 사업을 하던 수완 좋은 청년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했고, 그 사이에서 아이도 낳았습니다. 장인 역시 훌륭한 사업가로 사위를 존중하며 서로의 사업을 키워갔지요. 그러다가 전쟁이 일어납니다. 유대인이었던 아버지는 꽤 오랫동안 여러가지 방법으로 가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생존과 생존할 수 있었던 눈썰미와 기술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실제로 그는 대단히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용기있는 사람이기도 해요. 자랑할만큼 훌륭합니다.

하지만 그 후로 그는 완전히 변해 버립니다. 항상 다시 올지도 모르는 겨울을 대비하는 사람이 되어버려요. 한창 젊은 나이에 모든 물자가 귀했던 경험 이후로 물건을 함부로 버리지 못하게 됩니다. 언젠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거죠. 티백을 말려서 몇 번씩 우려 마시는 건 이상할 것도 아니었고요. 그는 그런 태도를 자신만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홀로코스트의 또 다른 생존자인 아내와 종전 후 태어난 아들에게도 강요합니다. 그리고는 동거녀에게도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강요하고요.

전쟁이 사람을 변하게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압니다. 하지만 전쟁의 피해자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생각을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잊기 쉽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0년 6월에 전쟁이 일어나 3년간 계속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다른 나라의 식민지였구요. 우리 어른들은 그런 시대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이건 잊혀지는 기억이 아닙니다. 각인되어 평생을 따라다니는 공통의 기억입니다. 한 사람만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귀중했고, 살기 위해서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젊은 시절을 겪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우리는 섞여 있습니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위대함을 이해하면서도 시대에 걸맞지 않은 아버지의 요구에 고통을 받다가 결국 아버지와 거리를 두게 됩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기 위해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일종의 화해입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알아도, 그 고통스러운 세월을 결국 이겨냈다는 사실을 알아도 그것이 아버지의 모든 말에 순종할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지금이 2차 세계 대전 시기도 아니고, 6.25가 막 끝난 때도 아니죠.

이해는 상호적인 겁니다. 아들 혼자 아버지를 이해해서는 소용이 없죠.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많은 자식들이 그 길을 선택해 자신을 희생하지만요. 아버지 또한 세상이 달라졌다는 걸, 아들은 다른 세상을 살아간다는 걸 이해한다면 훌륭한 결말일 겁니다. 그렇게 되진 않았지만요.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도 비슷합니다. 부모 세대의 고통을 알지만, 안다고 해서 내 세대의 고통이 작아지는 것도 아니고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식 세대가 부모 세대를 이해해야 하듯이 부모 세대도 자식 세대를 이해한다면 현대 사회가 처한 문제가 무엇인지 좀 더 직시할 수 있을 겁니다. 현재는 경제성장률이 10%가 넘는 고성장기와도 다르고 무엇을 해도 새롭던 시대와도 다릅니다. 때때로 부모세대가 우리들이 가져야 할 몫까지 흥청망청 써버렸다는 생각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꽤 다르다는 것.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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