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스크랩하다

(저런 일을) 왜 하는거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나 자신의 행동에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남의 일에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기도 합니다.

보통은 돈이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볼 때 이런 생각이 들죠. 엄청난 퀄리티의 팬사이트를 운영하는 사람을 본다거나, 에바 개봉 이벤트를 따라 다니며 도장을 찍거나 여튼 의미를 따지기 시작하면 타인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의문 자체는 타당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왜'라는 건 어쩌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지난 11월에 구매했던 책 중 하나입니다. 구매를 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스크랩을 꽤 좋아하게 되어서예요. 저는 작은 종이쪼가리들을 도통 못 버리는 사람입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면 그럴 수도 있는 입장권이라든가, 영수증이라든가, 포장지를 감은 리본, 빈 음료수병, 물건에 붙어 있던 상표 같은 것들도 그 대상입니다. 그렇다고 가지고 있으면서 매일매일 그것들을 쓰다듬으며 찬양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버릴 수가 없는 거에요.

언제쯤인가부터 버릴 수 없는 종이조각들을 남는 노트에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종이조각들이 쌓인 것은 상당히 오래된 일이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붙여도 끝이 나지 않습니다. 순서대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어서 어느 정도 체계를 잡아 붙일까? 생각하는 순간부터는 스크랩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구분을 하는 것을 관두기로 했습니다.

스크랩을 했다고 해서 그것들을 다시 찾아보는 것은 아니에요. 그냥, 버릴 수 없는 것들을 작은 공간으로 압축하는 행위에 가깝습니다. 스크랩을 훌륭하게 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더군요.

스크랩 하는 행위가 생활 안으로 옮겨진 것은 어느 날인가? 수사 드라마 같은 것이었는데, 스크랩을 해놓은 기사던가? 여튼 단서가 될 수 있는 스크랩북을 주인공에게 보여주는 장면을 보았을 때입니다. 요즘 영화에서는 잘 안나오지만, 80년대 90년대 미국 영화에서는 스크랩하는 장면이 종종 나왔어요. 아침에 신문을 보던 사람이 쿠폰이나 마음에 드는 기사를 잘라서 붙이는 것을 많이 보았다는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습니다. 스크랩이 추리에서만 있는 일은 아니더라구요. 깨달음을 얻는 순간 스크랩이라는 행위가 너무나 훌륭하게 느껴졌습니다.

요즘도 그러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여자아이들 중 어릴 때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를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일거예요. 패션지에서 오린 그림들을 잘라서 배치하고, 어디서 본 좋은 문구를 곁들이는 방식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어떤 애들은 정말 예술적으로 훌륭하게 다이어리를 꾸미는데, 저는 좀 소질이 없는 쪽이고 소심한 성격이라 남들에게 구경시켜 주거나 한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적고 보니 스크랩이란 정말 도처에 깔려 있네요. 그냥 그걸 '스크랩'이라고 잘 말하지 않을 뿐이지요.

이런 책도 있다는 건 전혀 몰랐었는데, 수공예 책을 많이 담다 보니 추천 목록에 등장했습니다. 표지를 보는 순간 이건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모든 페이지에 그림과 사진이 들어 있습니다. 총 9명의 일본에서 유명한 스크랩 아티스트(?!)의 스크랩을 소개한 책입니다. 그 중에서 여행을 테마로 한 것입니다.

여행이란 정말 온갖 잡동사니가 다 나오는 일입니다. 영수증은 어느 것이나 추억을 떠오르게 하고, 동전이나 관광기념물에 붙은 딱지, 입장권, 팜플렛 같은 것은 모두 기간 한정품이지요! 버릴 수는 없지만 잘 모아 두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스크랩이라는 것이 평면이 아닌 작품도 있더군요. 아주 조그마한 폴더 북을 만들거나, 필름에 돌돌 마는 스크롤 형식으로 만들거나, 자수로 하기도 하더군요! 아니 도대체 스크랩에 왜 이렇게 정성을 들여야 해? 라는 생각을 하다 보면 근원적인 답에 도착하게 되죠.

그게 어때서?

정말로 시간이 귀중하거나, 혹은 돈 안 되는 일이 경계가 된다면 애시당초 스크랩을 안 할 일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요.

제 취미는 재봉인데요, 그 중에서 홈패션이나 인형옷 만들기를 주로 합니다. 어느 쪽이든 초보에서 몇 걸음 정도 발을 뗀 실력이에요. 홈패션은 비교적 할만하지만, 인형옷 만들기는 그야말로 중노동입니다. 그 고생을 하느니 사 입히는 것이 이득일 정도예요. 실제로 제 실력은 사 입힌 옷에 미치지 못한 것까지 감안하면, 도대체 이런 짓은 왜 하는 거냐?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돈이 문제라면 사는 게 낫습니다. 하지만 재봉을 할 때 어쩌다 새로운 방법을 알았을 때, 완성한 옷을 인형에게 입혀 사진을 찍을 때의 기분은 사서 입히는 옷으로는 느낄 수 없지요.

그겁니다. 실제로는 돈을 주고 경험을 사는 겁니다. 이건 생산 행위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소비 행위입니다. 내 돈과 내 시간을 내 경험과 바꾼 것. 그러므로 완전히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어집니다. '돈도 안되는 그걸 왜 해?'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나의 경험을 우습게 보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스크랩에 왜 그렇게 시간을 들여?'라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그 자체가 즐겁고 행복한 거니까요.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작가들의 노고가 사랑스럽게 느껴집니다. 하나하나 여행지 기념품을 고르고, 붙이고, 꿰매고 하는 기분을 생각하면 저까지 뿌듯함을 전달받습니다. 어쩌면 역지사지란 이렇게도 힘든 건지요.

스크랩이나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는 분들께는 이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 밖에 친구의 다이어리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추천, 스크랩을 더 예쁘게 하고 싶은 사람이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


P.S. 따지고 보면 작가들은 이 책으로 인세를 벌고 있고, 관련 상점을 연다거나 하기 때문에 '돈 안 되는' 호작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죠. 뭐든 그렇게 될 기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덧글

  • 시루떡 2015/12/09 15:19 # 삭제 답글

    이추 고맙다조!! 책얘기하면서 잘 교류할수있었으면 좋겠쟝ㅇㅅㅇb
  • 시루 2015/12/09 15:20 # 삭제

    그리고 이책 아따시가 아주 좋아하는 책이쟝ㅋㅋㅋㅋ 뭔가 간접여행 같은 느낌이 들어. 저렇게 쓸데없는것만 잔뜩 모아놨는데 이국 느낌이 물씬 느껴져서 신기해ㅋㅋㅋㅋㅋㅋ
  • sirocco 2015/12/26 02:48 #

    맨날 사는 책만 사서 이런 책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너무 금방 읽어서 그렇지 보는 건 너무 좋더라. 교류활동 안 한지 너무 오래 됐는데 뉴페이스를 알게 돼서 기뻐
댓글 입력 영역



애드센스 사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