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샹보 거리

어떤 연유로 산 건지 기억이 안 납니다. 할인책일까 싶기도 하고요. 구매 시기에 비해 책 상태가 엄청 안 좋습니다. 앨리스 먼로 책을 살 때 연관 도서로 있었나 싶기도 하고요. 1년쯤 전에 몇 권 샀거든요. 캐나다 문학의 대모라고 적혀 있지만 이름도 들어 본 적 없네요. 이 작품으로 처음 접한 작가입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보니 아주 예전 "책을 읽읍시다" 라는 프로그램에서 소개했던 《내 생애의 아이들》의 작가더군요. 이 책은 그 책의 프리퀄이라고 할만한 이야기로 집필 시기도 앞섭니다.

집이 먼저 있고 거기에 사람이 들어오는 이야기가 첫 단 편이어서 그런지 첫 인상은 《메리포핀스》였어요. 읽어가며 점점 《나의 안토니아》나 《행복한 그림자의 춤》도 떠오르더군요. 공통점은 북미대륙의 여성 작가들입니다.

순문학을 얼마 읽지 않아서 모든 여성 작가가 이런 느낌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셋 사이에는 연관된 분위기가 있습니다. 때로는 무기력한 수동성,그마저 포용하는 따뜻한 시선과 저항. 가장 크게 닿는 것은 따뜻함입니다.

이 이야기는 1900년대 중반 데샹보 거리에 사는 가족의 9남매 중 막내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의 1인칭 소설입니다. 이야기들은 모두 가족에 대한 것이어서 사소한 사건들을 담고 있어요. 완전히 사소한 이야기들이 어린 막내였던 주인공을 통해 무해하게 그려져서 더 가슴 아프게 전달됩니다. 생각해 보면 슬픈 이야기는 별로 없어요. 그저 누군가가 어린 시간을 지나쳐 어른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슬퍼지는 건 제가 어른이어서 그럴 거에요.

따뜻함에 푹 젖어 남의 가정사 희로애락을 지켜보노라면 나의 희로애락도 조금쯤 더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책의 배경인 1900년대 초중반의 남의 나라 이야기를 참 좋아합니다. 매혹적인 시대였죠. 꿈도 기회도 많았고 반대로 비참함이 따라다녔던 시대에요.

엄청나게 재미있는 책은 아니었지만 쉬어가기에 좋은 책입니다. 작가의 다른 책들도 몇 권 번역이 되어 있는 건 같지만 인기 높은 작가가 아니라서 가격 조정이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딱 1000원만 내려주면 사볼 의향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 사람을 사랑해요. 결혼할 거예요. 저는 그 사람이 좋아요……."
그 후로 나는 거의 평생 동안 누군가가 두려움으로 가슴 졸이지 않고 그렇게 '사랑해요……'라고 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토록 벌거벗은 그 사람을 나의 두 팔로 감싸주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조지아나 언니, 엄마에 맞서서 그 편이 되어주기에는 큰언니를 너무 잘 몰랐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꼭 언니 편이 되어줘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을 사랑해요. 잘 들으세요,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요! 아무도 내 마음을 돌릴 수 없어요'라고 줄기차게 외치는 그 목소리의 당당함 때문에라도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자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딱하구나, 조지아나. 넌 사랑이 천 년 만 년 간다는 듯이 말하는데……사랑이 끝나고……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 없으면……그게 얼마나 끔찍한지 아니?"
〈결혼 방해작전〉 62쪽


갈매기를 바라보는 엄마 얼굴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내게 말했다.
"모르는 일이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어쩌면 엄마는 폭삭 늙기 전에 멀리 떠나게 될지도 몰라. 그리고 흥미진진한 모험에 뛰어들 거야……."
"엄마는 벌써 늙었잖아요."
"그렇게까지 늙은 건 아니야." 엄마는 약간 심기가 상한 듯 대꾸했다. "너도 마흔아홉 살이 되거든 두고 봐라. 그 나이에도 아직 좋은 세월이 남았다고 생각하게 될 테니."
"으……난 절대로 마흔아홉 살이나 먹지 않을 거예요!"
내가 발끈했다.
"그러자 엄마는 자기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고, 엄마가 인생에서 정말로 바라던 것을 전부 다 얻기에는 늦은 게 사실이라고 순순히 인정했다.
엄마가 인생에서 간절히 바라던 게 무엇이었냐고 내가 물었다. 엄마가 바라던 것이 집, 남편, 나를 비롯한 자식들이 아니었단 말인가?
엄마는 아니라고, 적어도 엄마가 아주 젊었을 때에는 그런 것만 바라지는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엄마는 남편, 집, 자식들을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덧붙였다.
〈집 나온 여자들〉104쪽-105쪽


(전략) 빌헬름은 그저 멀리서 "디어 하트Dear heart……"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 말을 뱉고 나서는 내내 잠잠했다. 나는 이마까지 새빨개져서는 그의 침묵을 1, 2분 정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나에게 마음을 전할 기막힌 수단을 찾았다. 내가 '여보세요'라고 했더니 가만히 듣기만 하라는 빌헬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나는 음을 맞추는 바이올린 소리를, 이어서 〈타이스〉의 첫 소절을 들을 수 있었다……. 빌헬름은 전화로 한 곡 전부를 들려주었다. 캐슬린이 피아노 반주를 해주었던 모양이다. 저만치 거리를 두고 어우러지는 피아노 음이 들렸고, 왠지는 모르지만 그 사실이 살짝 신경에 거슬렸다. (하략)
〈빌헬름〉244쪽-245쪽


어느 날 로베르 오빠가 우리 집에 들러서 평소 귀여워하던 나에게 1달러를 주었고, 나는 즉시 유혹의 궁전으로 달려갔다. 나로서는 1달러를 한꺼번에 몸치장에 쓰는 것이 처음이었다. (중략) 이미 섬세한 향수병, 장밋빛이나 우윳빛 용기, 점토 재질의 투명하고 날씬한 단지 따위가 반짝반짝 빛나는 통에 홀딱 넋이 나갔지만 그보다도 계산대 점원을 보고 감탄하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원숙하고 약간 생기를 잃은 듯한 그 여자는 그 모든 화장품들의 우수 어린 미덕을 본인의 얼굴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나보다 두 배는 더 나이가 많거나 어쩌면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파랗게 칠한 눈꺼풀, 스페인 빗을 찔러 고정한 숱많은 검은 머리, 새로 그린 눈썹, 무감각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얼굴에는 삶이더 이상 그녀를 아프게 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대로 상처받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뭘 좀 아는 것 같기도 한 면도 있었다. 어쨋거나 나는 그 누구든 그 여자보다 더 닮고 싶었던 적은 없었으니 그녀의 얼굴에서 꽤나 강렬한 매력을 느꼈던 셈이다. 그 여자에게는 애들 장난 같은 일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벌써부터 늙어서의 모습이 살짝 보인다는 듯 나를 노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단단히 구워삶았고, 골무만한 크림 한 병 값으로 1달러 지폐를 어렵잖게 가져 갈 수 있었다.
〈장신구〉 250쪽-251쪽


나는 여전히 다락방에 자주 올라갔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된 후에도, 나이가 좀 들어서 이른바 청춘의 초입에 들어선 때까지도 그랬다. 거기에는 뭐하러 올라갔을까? 나 자신을 되찾으려는 듯 다락방으로 향하던 그날 저녁에 나는 아마 열여섯 살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커서 뭐가 될까……나는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될까……그래, 바로 그런 물음들을 나는 슬슬 떠올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 앞날에 대한 선택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고, 언젠가 나 자신도 낯선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 결정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날 저녁 다락방 작은 창문에 다가가 가까운 연못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세월이 우리 앞에 펼치는 어둡고 광막한 땅이ㅡ나타났다는 표현을 쓸 수 있다면 말이지만ㅡ홀연히 나타났다. 그랬다, 내 앞에 드러난 고장은 그랬다. 가없이 넓지만 온전히 내것이요, 그럼에도 아직 다 발견하지는 못한 고장이었다.
〈연못의 목소리〉2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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