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OWCAT의 혼자 놀기

집이 좁은 관계로 많은 책들이 도로 팔려 나가고, 잘려서 전자 데이터로 변환되기도 합니다.

제 책장은 오래 되었고, 한 때 (혹은 지금도 때때로) 읽을 여력이 없으면서도 할인의 시기에 맞춰 십 수 권의 책이 책장으로 들여 오곤 했습니다. 이렇게 사는 책들은 충동적이어서 쉽게 잊혀집니다. 책장을 매일 진득하게 들여다 보는 것은 아니므로 제 책장에 어떤 책이 있는지 잊어버리기도 해요. 꽤 자주 그렇습니다.

얼마 전 새벽에 갑자기 기운을 내어 가구를 재배치 하였습니다. 책이 적으면 수월할 텐데 책이 많으니 책을 빼서 쌓고 재분류하는 것은 큰 일입니다. 이틀인가 사흘 걸려 책장을 새로 정리하고, 다시 읽을 일이 없어 보이거나 심지어는 싫어하기까지 하는 책들을 골라 내었습니다. 그렇게 상자에 넣어둔 것이 2주가 넘어가는 참입니다.

오늘은 기운을 내어서 상자를 꺼내 알라딘에 팔기 등록을 하려고 했어요. 이 일은 꽤 기력이 필요합니다. 좀 더 상태가 좋아 보이도록 클리너 티슈로 표지를 닦고, 먼지를 떼어내고, 책장 사이에 현금이나 영수증 같은 건 끼어 있지 않은지 확인을 합니다. 보통 한 번에 열 권 이상을 판매하기 때문에 이 작업은 꽤 더딥니다.

팔기로 결심한 책 중에 어떤 책은 매우 미련이 없는 반면에, 어떤 책은 몇 번이고 헌 책 상자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기도 합니다. 그런 책들을 팔기 쉬운 책들에 비해 더 꼼꼼하게 책을 살펴 보게 돼요. 차라리 스캔하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지요. 새로 산 책을 읽을 시간조차 모자라 쩔쩔매고 있으니 한 번이라도 읽은 책을 또 읽을 시간은 별로 많지 않다는 사실을 간과하고서 혹시 다시 읽게 될지 모르는 그 '언젠가'를 고민합니다.

사기로 결심했던 어떤 책을 집 밖으로 내 보내기로 결심하는 것은 꽤 힘든 일입니다. 애초에 집에 둘 만 하다고 생각해서 산 거니까요. 온갖 잡동사니를 끌어 안고 사는 저 같은 사람에게는 더 힘들어요. 차라리 책을 잘라서 스캔하는 쪽이 좀 더 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시 열어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파일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의 평화를 가져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자원을 하나의 기준으로 환산한다면, 책 스캔은 인생의 낭비라고 볼 수 있어요. 차라리 돈은 벌면 되지만 시간을 버는 방법은 없으니까요. 헌 책을 팔고 파일을 사는 쪽이 훨.씬. 낫습니다. 하지만 어쩐지 그런 선택은 하지 않게 되더라구요. 역시 현명한 선택을 위해 《무소유》를 사야하는 걸까 싶네요.


원래의 책 이야기로 돌아와서.

헌 책 상자에는 이 책도 들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들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으며, 이런 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죠. 이 책의 표지만 보았을 때는 팔기 어려운 책이 아니었습니다. 순간의 변덕이 들어 책장을 펼치기 전에는요.

웹툰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 인터넷에 그림을 그려 올리는 사람이 적던 시절, 포토샵이 버전 5쯤 머무르던 때에 나온 이 책은 지금 보면 그림의 테두리에 일어나는 화질 열화가 눈에 띕니다.

약 10년 전에는 지금보다 더 이상하게 취급 받던 내향적인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이 책이 내성적인 사람의 '나 좀 내버려 둬요.' 한국판 저항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제 기억에는 촉발제 중 하나였어요. 저같은 내성적인 사람은 그/그녀에게 좀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할 지도요.

책은 얇고 한 쪽은 제목, 다른 한 쪽은 한 쪽짜리 만화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10분도 안 걸려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느낀 즐거움은 10분 이상이었지요. 책 정리를 미뤄두고 지금 감상문을 쓰고 있으니까요.

SNOWCAT은 그와 말투가 꽤 비슷한 친구가 알려 주어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2000년 말 아니면 2001년 초고요. 이 책은 2001년 8월 15일에 나온 초판으로 되어 있네요. 이 때의 SNOWCAT은 제게 좀 더 쿨하고,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좀 더 멋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니 그때의 생각들이 다시금 떠오르네요.

엄마에게 혼날 걱정을 하고, 지금보다 더 소심하고, 더 불평쟁이인 '어린' SNOWCAT을 보는 일이 즐거웠습니다. 이도 제 청춘의 한 단면이겠지요. 이 책을 다시 책장에 돌려 놓습니다. 이러니 책장은 늘 미어 터집니다.


P.S. 이 책과 함께 상자에 들어 있던 《SNOWCAT in PARIS》는 예전에 혹평한 대로 여전히 그냥 그래요. 파리를 동경하지 않는 파리에 가서 머무르며 만화를 그렸다는 것이 제게 너무 먼 이야기라 그렇겠지요.

덧글

  • Marcelin 2014/10/27 13:29 # 답글

    시로꼬님의 글을 읽으니 고양이를 좋아하지도 않던 제가 매일같이 스노우캣 홈페이지에 구경가며, 다이어리까지 열정적으로 사 쓰던 그 시절이 생각나네요^^
  • sirocco 2014/11/02 02:57 #

    그때의 만화를 보니까 우리는 함께 어른이 되었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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