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크 월드

끙끙거리며 읽었습니다. 친구들이 이 책의 어떤 부분을 제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두 읽기까지 시간이 엄청나게 걸려 버렸네요. 그 와중에 다른 책도 읽지 않았고요. 트위터 때문인지, 체력도 참을성도 바닥난 건지… 역시 어릴 때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놀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마법을 쓸 수 없지만 언어에는 재능이 있는 린스윈드라는 마법사가 디스크 월드의 매우 강력한 제국에서 린스윈드의 고향 앙크모포크로 관광을 온(!) 두송이꽃이라는 외국인을 가이드 하다고 생기는 일을 다루고 있는데요. 잡기에 능하지만 본업에 충실하지 못한 캐릭터답게 불만이 많고 매사 비판적인 반면, 두송이꽃은 먼 외국에서 와서(?!) 현실감각도 떨어지고, 외국인인 점을 감안해도 놀라울 정도로 태평한 사람이어서 사사건건 린스윈드를 괴롭게 하지요.

《디스크 월드 - 마법의 색》은 이야기의 배경 디스크 월드의 소개서에 가깝습니다. 린스윈드는 아직 매력적이지 않고, 두송이꽃의 선량함도 갑갑할 지경이죠. 디스크 월드의 모양을 구상하기는 어렵고요. 거대한 거북이 등에 얹힌 네 마리의 거대 코끼리가 떠받친 원반의 세계를 디스크 월드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이들이 유랑하는 지리지는 상상하기 힘듭니다. 통상의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는 이동이 많기 때문에 더 그렇기도 하겠죠.

상권보다는 하권이 읽기 쉬우며, 문장도 더 아름답습니다. 《디스크 월드》는 상당히 긴 시리즈라고 하지만 세계관만 공유하는 이야기이므로 《디스크 월드 - 마법의 색》, 《디스크 월드 - 환상의 빛》의 주역이 전 시리즈에 다 나오지는 않는다고 해요. 이들이 등장하는 다른 편도 있고 다소의 연속성도 있는 정도라고 하네요.

상 권만 읽었을 때는 기대와는 다른 책이라 조금 실망할 뻔 했는데, 하 권이 참 좋습니다. 묘사도 좋고요. 1986년작이던데, 지금의 판타지에 힌트가 된 부분도 보이고, 전통을 패러디한 부분도 보입니다. 한국인이다 보니 패러디의 근원을 알 수 없어서 갑갑한 부분이 있지만, 하 권은 단독으로도 훌륭한 판타지에요.

판타지를 좋아한다면 추천할 만 합니다. 상 권도 발상이 뛰어 나므로 저처럼 지쳐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거에요.

린스윈드는 제일 가까이 있는 나무를 걷어찼다. 나무는 정확히 그의 머리에 도토리를 떨어뜨렸다.

"아얏."

린스윈드의 비명에 나무는 아주 낡은 문이 열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꼴 좋다."

린스윈드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하다가 물었다.

"네가 말한 건가?"
"그래."
"방금 그 말도?"
"그래."
"오."

린스윈드는 잠시 생각해보고 나서 다시 물었다.

"혹시 이 숲에서 나가는 길을 알고 있다거나 하진 않겠지?"
"모르지. 난 별로 안 돌아다니니까."
"그거 아주 지루하겠군."
"모르지. 나무 아닌 다른 것이 되어본 적이 없으니까."

린스윈드는 나무를 면밀히 뜯어보았다. 이제까지 보아온 여느 나무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마법에 걸린 나무인가?"
"아무도 그런 말은 안해 줬지만, 그런 것 같아."

린스윈드는 생각했다. 나무와 대화를 나누는 건 불가능해. 미친 사람이나 나무와 이야기를 나누지. 그런데 난 미치지 않았으니까, 나무도 말을 할 수 있어.

그리고 그는 단호하게 인사했다.

"잘 있어."
"이봐. 가지 마."

나무는 말을 하다 말고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나무는 린스윈드가 비틀거리며 덤불 사이로 멀어져가는 광경을 지켜보고, 가만히 서서 잎사귀에 떨어지는 햇빛과 뿌리에서 물이 꼴록거리는 소리, 자연스러운 태양과 달의 인력에 응하여 끌려 올라갔다 흘러내리는 수액의 느낌을 음미했다. 나무는 생각했다. 지루하다. 이 얼마나 이상한 말인가. 물론 나무가 따분한 존재일 순 있고 딱정벌레들은 늘 그렇지만, 저 사람 말은 그런 뜻이 아닌 같아. 그리고……정말 나무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있을까?

린스윈드는 이 나무와 두 번 다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이 짧은 대화는 언젠가 온 세상의 숲을 휩쓸 최초의 나무 종교에 단초가 되었다. 이 종교의 교의는 이러했다……. 선량한 나무로서 깨끗하고 품위 있고 고결한 삶을 영위한다면 죽은 뒤에 내생을 약속받을 수 있다. 진정 훌륭한 삶을 살았다면 그 나무는 5,000개의 두루마리 휴지로 환생하리라.
《디스크 월드》 하 23-25


"테이블 좀 더 먹지 그래."
"됐어요. 마지팬(아몬드와 설탕, 달걀을 이겨 만든 과자)을 별로 안 좋아해요. 어쨌거나 남의 가구를 먹는 건 옳지 않은 짓이잖아요."

린스윈드와 두송이꽃의 대화에 스와이어스가 말했다.

"걱정 마라. 늙은 마녀가 안 보인지 한참 됐다. 어린것들 둘이서 적절히 처리했다더라."
"하여튼 요즘 애들이란."

린스윈드의 말에 두송이꽃이 거들었다.

"가정교육이 문제예요."
《디스크 월드》 하 55-56


주위에 구름이 휘감기고, 끔찍하게 무거운 느낌이 들더니 바위가 확 햇빛 속으로 튀어 나갔다.

바위는, 차갑지만 밝고 푸른 하늘 속에서 구름층 위를 수평으로 날았다. 어젯밤에는 한기가 스밀 정도로 멀어 보였고 오늘 아침에는 무시무시하게 차고 끈적해 보였던 구름이 지금은 사방으로 뻗어나간 희고 푹신한 카펫 같았다. 가끔 산봉우리 몇 개가 섬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뒤편으로는 바위가 끌고 온 바람이 구름을 투명한 소용돌이 모양으로 조각해 놓았다. 바위는…….

바위는 길이가 9미터, 폭이 3미터 정도에 푸르스름한 색깔이었다.

두송이꽃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렇게 멋질 수가!"

린스윈드는 물었다.

"에, 우리가 어떻게 떠 있는 거요?"
"설득의 힘이죠."

벨라폰은 로브 자락을 짜며 대답했고, 린스윈드는 사려 깊게 "아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벨라폰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팔을 쭉 뻗어 가늘게 뜬 눈으로 먼 산을 내려다보았다.

"떠 있게 하는 건 쉬워요. 착륙하는 게 어렵죠."

두송이꽃이 말했다.

"설마 진심은 아니겠죠?"
"설득은 온 우주를 한데 묶는 힘이에요. 모든 게 마법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봐야 소용없어요."

린스윈드는 흘끗 눈을 돌렸다가 희박해진 구름 사이로 한참 밑에 있는 눈 덮인 땅을 내려다 보고 말았다. 린스윈드는 눈앞에 있는 것이 미치광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일엔 익숙했다. 이 미치광이 말에 귀를 기울여야 여기 있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었다.
《디스크 월드》 하 74-75

덧글

댓글 입력 영역


애드센스 사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