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의 길

이 책은 정말로 좋은 책입니다만 번역이 굉장히 나쁩니다. 두 역자는 우리말을 굉장히 이상한 방식으로 쓰고 있어요. 국어 전공이 아닌 저로선 정확히 어떤 이유 때문이라고 지적하기 어려우나 일단 조사를 매우 생소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어에서 instead 뒤에는 of가 올 거라고 예상하는 것처럼 '심지어' 다음에는 조사 '도'가 붙는 무언가가 오겠거니 생각하게 마련인데 그런 예상이 거의 적중하질 않습니다.

읽는다는 행위는 시각 정보를 받아들여 분석하는 활동과 생각 활동 두 가지인데, 생각이 눈보다 빠르기도 하고 느리기도 합니다. 생각을 하면서 읽어야 하는 이런 책은 생각이 문장의 앞부분을 보고 이런 이야기가 올 것이라 예상하면서 생각하기와 병행해야 하는데 이런 흐름을 자꾸 깹니다. 소리내서 읽어 보면 술술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구어체가 아니라서 그런 걸까요?

우리말은 문장의 순서가 뒤 바뀌어도 상관 없다고들 이야기 하지만 많이 쓰는 구조가 있으니 그 구조를 따라 가는 것이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됩니다. 라틴어도 대표적으로 정해진 순서가 없는 언어인데, 이로 인해 해독이 굉장히 난처한 언어가 되었죠. 모국어라도 일상의 규칙을 어기면 이해하기 힘든 건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제 읽기 단련이 덜 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저도 저런 식으로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읽을 만 합니다. 괜히 한 시대를 풍미한 책이 아닙니다. 넓은 시야와 명징한 표제, 장광설을 늘어놓지 않고 짧게 써내는 실력까지 말입니다.

너무 예전 책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몇 페이지를 읽는 순간 사라집니다. 이 책은 그때로부터 1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났기에 더 흥미로운 책입니다. 이 책은 미래에 대한 책이고, 미래를 만들어갈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쓴 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고민이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부럽습니다. 과연 우리의 정치가들이 미래를 생각하고 있는지 염려가 됩니다.

오늘날 정치 이념은 영감을 불어넣는 활력을 상실하고, 정치 지도자들은 지도력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공공 토론은 타락해 가는 도덕적 기준, 점점 심해지는 빈부 격차, 그리고 복지국가가 당면한 중압감에 관한 우려에 의해 좌우된다. 확고하게 낙관하고 있는 집단은 기술이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 뿐이다. 그러나 기술적 변화는 엇갈리게 혼합된 결과를 낳고, 게다가 어떤 경우든 효과적인 정치프로그램의 기초를 제공할 수 없다.

정치적 사유가 영감을 주는 본래의 특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그것이 일상적이고 국지적인 것에 단선적으로 반응하거나 거기에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적인 삶은 이상이 없다면 별 의미가 없고, 이상은 현실의 가능성과 결부되지 않으면 공허하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사회를 창조하길 원하며, 그것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구체적 수단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 책은 어떻게 하면 이러한 목표가 실현될 수 있으며 정치적 이상주의가 부흥할 수 있는지 제시하고자 한다.
38쪽-39쪽

미국에서는 1964년에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 '당신은 얼마나 자주 정부가 일을 잘하고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에 '항상' 또는 '대부분'이라고 답변한 사람이 76퍼센트였다. 그런데 1994년의 똑같은 조사에서는 그 비율이 25퍼센트로 떨어졌다. 정부에 대해 계속적인 신뢰를 표명한 사람들 중에 61퍼센트가 이전의 대통령 선거에 투표했는데, 이는 덜 신뢰한다고 답변한 사람들의 35%와 비교되는 수치이다. 젊은 층은 '하위정치'의 쟁점들에 대해 구세대보다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의회 정치에 대해서 노인들보다 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101쪽

광우병 소동은 생태환경적 리스크가 현대 정치의 '한 구석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핵심 영역으로 밀려 들어올 수 있다는 충분한 증거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의료 정책은 환경 오염의 통제가 단지 '환경'이라는 명백히 분리된 영역의 문제인 것처럼, 또는 그러한 정책이 기술적 변화 과정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세워질 수 없다는 점은 명백하다. 생태환경적 리스크에 적절히 대처하는 일은 가까운 장래 동안 중대차한 사안이 될 것이다.
112쪽

새로운 리스크 상황의 복잡한 성격은 그것에 대한 공개 토론으로 번지는 방식으로까지 확장된다. 다시 광우병의 예를 들어보자. 그 당시에 정부는 처음에 광우병이 사람의 건강에 위험하다는 점을 부정하다가, 나중에 과학적 증거가 새롭게 제시되자 입장을 바꿨다는 아유로 상당한 비난을 받았다. 이런 비일관성을 정부의 무능력으로 일축해 버리는 것 역시 안이한 태도이다. 새로운 리스크가 상존함에도 과학정 증거가 완전하지 않을 경우, 정부는 무모한 행위가 될지 모르면서도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기본적인 불확실성은, 새 과학 정보를 이용해야 진상이 정확히 드러나는, 아직까지는 가능성만 보이는 위험을 언제 어떻게 발표하느냐에 관련되어 있다. 새로운 리스크 시나리오를 발표한다는 것은,광우병 소동이 입증하듯이, 중대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어떤 리스크가 공개되고 나서 ㅡ 정부의 개입에 의해 '공식적인(official)' 지위가 부여되고서 ㅡ 너무 과장된 것 또는 있지도 않은 것으로 입증된다면 비판가들은 '유언비어로 공연히 겁주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당국이 리스크가 미미하다고 믿거나, 발표에 신중을 기한다면, 비판자들은 '은폐하고 있다'고 하면서, 왜 일찍 시민들에게 알리지 않았느냐고 혹평할 것이다.
113쪽 - 114쪽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평등의 유일한 모델로 기회의 균등, 혹은 능력지배라고 말한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모델이다. 왜 이러한 입장에 유지될 수 없는지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달성될 수 있다면, 철저한 능력지배 사회는 결과적으로 심각한 불평등을 만들어 내고, 이것은 사회 결속을 위협할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시장에서 나타날 수 있는 승자 독식 현상을 고려해 보자. 다른 사람보다 단지 근소하게 더 나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보수를 받는다. 일류 테니스 선수 혹은 일류 오페라 가수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번다. 이것은 능력지배 원칙이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원칙이 작용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러하다. 겨우 인지할 수 있는 근소한 차이가 상품의 성공이나 실패 사이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면, 이것이 기업에 적용될 때 이해 관계는 엄청나게 크다. 그러나 다른 사람보다 능력이 조금 뛰어나다고 인식된 개인은 위와 같은 논리에 맞지 않는 불균등한 보상을 받는다. 이들은 '알려지지 않은 명사'라는 새로운 범주에 속한다. (하략)
166쪽-167쪽

민족적 정체성은 이중성 혹은 다중적 소속에 관용을 베풀 수 있어야만 좋은 영향 요인이 될 수 이싿. 잉글랜드인인 동시에 영국인이요 유럽인이며, 동시에 세계적 시민 의식을 지닌 개인들은 이것들 중 어느 하나를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 중 어느 하나의 특별한 정체성을 가진다고 해서 다른 정체성들을 받아들이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외국인에 대해 혐오적인 민족주의는 이것과는 정반대로 다음과 같은 입장을 갖는다. '민족은 하나이고 나우어질 수 없다.' 민족은 문화적 보호주의를 내세우고, 그것이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점, 즉 그 민족이 다른 민족과 독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가정한다. 그러나 민족은 운명을 지니지 않으며 모든 민족들은 예외없이 '혼혈민족(mongrel nations)'이다. 민족은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다. 민족은 초기의 종족 공동체와 어느 정도의 소원한 연관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최근 역사의 산물이다. 민족들은 모두 다양한 문화적 부분 집단들로부터 형성되었다.
204쪽

핑백

  • 책 그림자 : 정부에 대해 계속적인 신뢰를 표명한 사람들 중에 61퍼센트가 (...) 투표했다. 2014-01-04 01:57:59 #

    ... 교되는 수치이다. 젊은 층은 '하위정치'의 쟁점들에 대해 구세대보다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의회 정치에 대해서 노인들보다 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제 3의 길》101쪽 확실한 것은 믿는 자가 세상을 바꾼다고 하는 낭만적인 일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만화에서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은 믿는 자가 바꾸고 있다. 결과가 ... more

덧글

댓글 입력 영역



애드센스 사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