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이 무슨 권리로 그 땅에 대해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을까? 밑줄긋기

1995년 아일랜드의 더블린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가르칠 때 나는 조상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아내와 함께 캐릭매크로스라는 시골 마을로 갔다.

1850년대에 나는 증조부뻘 되시는 분이 보다 나은 삶을 살겠다면서 10대 시절에 아일랜드 고향 마을을 떠나서 황금이 넘치던 빅토리아 식민지로 갔다. (중략)

이제 아무도 찾지 않는 마을 어귀의 옛날 묘지에서 가랑비 속에 망가진 비석들을 뒤지다가 친절한 이웃 사람을 만났다. 그 여자는 우리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따뜻한 커피를 대접했다. 그리고 자기가 알고 있던 그 지역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그 여자는 우리 조상의 이름이 에아킨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이렇게 말했다.

"네. 그분도 그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죠. 4백 년 전에 크롬웰의 부하들과 함께 왔을 겁니다."
"4백 년요? 4백 년은 너무 오래되지 않았나요?"
내가 순진하게 반문했다. 원주민이 저지 시위를 하는 가운데 유럽인의 오스트레일리아 정착 2백 주년 기념행사가 얼마 전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4백 년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여자가 대꾸했다. 그녀의 말뜻은 분명했다. 만일 내가 가족의 뿌리를 찾고자 한다면, 아일랜드 땅이 아닌 4백 년 전에 우리 조상이 살았던 잉글랜드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4백 년 동안 줄곧 한 마을에 살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에아킨이라는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아했다. 그리고 도대체 아일랜드 인이라는 규정 속에 어떤 의미들이 담겨 있는지 의아했다. 아일랜드 인의 먼 조상들은 모두 제각기 다양한 시간대에 아일랜드에서 성장하기 전에, 아일랜드가 아닌 다른 곳에서 아일랜드로 이주했었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 부부는 그리스가 마케도니아 인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더블린의 강의실에서 여학생이 보여주었던 확신과 열정으로 그들은 마케도니아 인의 존재를 부정했다. 지금의 그리스라는 나라가 세워지면서 마케도니아 식 지명은 모두 그리스 식 지명으로 바뀌었다. 도시나 마을 이름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이름까지 모두 헬레니즘 문화가 느껴지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아내는 어릴 적에 마케도니아 식의 칠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리스 정부 관리가 그리스 식 이름인 바실리키로 바꾸었다고 했다.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한 뒤에 그녀의 아버지는 딸이 처음으로 학교에 가던 날에 나무로 필통을 만들어주었는데 필통 뚜껑에 칠라라는 이름을 새겨주었다. 그런데 학교 선생님은 필통 뚜껑의 그 이름을 보고는 즉석에서 실비아라고 다시 이름을 지어주었다.
《정복의 법칙》서문

(전략) 대신 시드니에서 사귄 의심 많은 친구인 총독의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다시 총독에게 편지를 보내서, ‘(반디멘스랜드를 처음 발견한) 타스만과 그의 상속자들이 반디멘스랜드를 당신에게 유산으로 남기겠다는 유언을 남기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어째서 반디멘스랜드에 대한 소유권을 영국이 주장하는지 모르겠다고 물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원주민이 땅을 차지하고 잘 살고 있는데 유럽인이 무슨 권리로 그 땅에 대해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지 물었다.
《정복의 법칙》 1장


저자는 오스트레일리아 사람, 부인은 그리스 사람, 강의는 오스트레일리아와 아일랜드, 도쿄에서 한 사람으로 다양한 국가를 다닌 만큼 넓은 시야가 돋보입니다. 서문에서부터 반해 버렸어요.

이 휴먼앤북스는 이번 이북 할인 행사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만, 읽어보니 저렴한(...) 표지 디자인과 달리 번역질이 좋네요. 알아듣지 못할 문장이 튀어나온다거나 하는 일 없이 술술 읽혀요. 다만 이북으로 변환은 좀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종이 책으로 봤으면 참 인상이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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