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톰의 정원에서

이 감상문엔 이 책과 다른 책의 중요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릴 적 읽은 동화를 이야기 하는 게시물에서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읽었습니다. 정말 좋아하는 이야기라고요. 저는 읽은 적이 없는 이야기이지만, 다른 동화처럼 이 이야기도 반드시 좋은 이야기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할인코너에서 집었는지, 중고코너에서 집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네요.

수요일 광복절 휴일에 집에서 쉬다가 좀 쉬운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이 책을 사 두었단 사실을 떠올렸어요.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며 이 책을 읽었습니다. 전 제목만 보고 아주 말썽꾸러기가 주인공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군요. 생각해 보면 비버리 클리어리의《개구쟁이 오스틴》이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사랑스러운 개구쟁이》에 나오는 에밀 정도를 제외하고는 정말 야단스러운 아이가 주인공인 동화는 많지 않은 것 같아요. 특히 작가가 영국인이라면 거기 나오는 아이들은 대부분 얌전한 것 같아요. :D

톰 역시 생각이 의젓한 아이랍니다. 어떤 아이인가 하면요,
톰이 뒷문 층층대에 혼자 서서 눈물을 흘린다면, 그것은 분명 화가 복받쳐 나오는 눈물일 것이다. 톰은 작별의 눈길로 정원을 둘러보다가, 그 정원과 피터를 두고 혼자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그만 부아가 났다. 이번 방학을 피터와 함께 정원에서 즐겁게 지낼 계획이었는데…….
9쪽

톰은 문을 활짝 열어, 달빛이 들어오게 했다. 해가 완전히 떠오르기 전에 비치는 희붐한 새벽빛처럼 환한 달빛이 집 안으로 쏟아져 들어 왔다. 그 달빛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톰은 시계를 보러 돌아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대신 뒷문 층층대 쪽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바깥에 펼쳐진 풍경을 보았을 때, 처음에는 놀랐고, 다음에는 화가 났다. 이모랑 이모부가 나를 속였어. 거짓말을 했어. 이모와 이모부는 이렇게 말했었다.

“뒤뜰엔 나가 봤자 볼만한 게 없어, 톰. 그저 쓰레기통이 놓여 있을 뿐이야. 뒤뜰에는 정말이지 볼 게 아무것도 없단다.”

아무것도 없다고? 그래, 널찍한 잔디밭, 꽃이 만발한 꽃밭, 하늘 높이 자라 있는 전나무, 잔디밭 양쪽을 따라 새우처럼 웅크린 채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아름드리 주목나무들, 오른쪽에 서 있는 웬만한 집 정도 크기의 온실, 잔디밭 네 귀퉁이에서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또 다른 정원 속으로 구불구불 뻗어 있는 오솔길……그래, 이것들만 빼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겠지.

너무나 놀라서 숨을 삼키고 서 있던 톰은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그제서야 숨을 깊이 토해냈다. 내일 낮에 몰래 여기 와 봐야지. 이모랑 이모부는 나를 여기에 못 오게 했지만, 이제는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을 거야. 이모도, 이모부도, 뒷집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도, 성질이 까다롭다는 바솔로뮤 부인도……잔디밭을 전속력으로 달려서 꽃밭을 단숨에 뛰어넘어 봐야지. 온실의 반짝이는 창문 안도 들여다봐야지. 어쩌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을 거야. 주목나무 아래로 나 있는 오솔길도 걸어가 보고, 나무들 사이의 후미진 빈터도 찾아가 보고, 나무에 올라가 서로 뒤엉켜 있는 가지를 타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아가 봐야지. 누군가 나를 찾으러 오면, 무성한 잎과 가지와 줄기 사이에 새처럼 안전하게 숨어 버리는 거야.
33-36쪽

생명력이 넘치는 아이지만 전혀 무해하죠. 이 아이는 어디서건 나무와 정원을 너무나 사랑하는 조지 5세 재임기의 평범한 영국 소년입니다. 이런 성향은 제가 기존에 읽었던 《세계의 정원》에서 본 영국의 자연주의적 성향을 그대로예요. 저는 꽤 오랫동안 영국이라는 나라를 좋아했지만, 영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는 잘 몰랐어요. 《세계의 정원》을 읽으면서 다른 나라에 비해 영국이 자연친화적이고 소박한 국가라는 걸 알게 되었죠. 거기에 더해서 비아트릭스 포터의 작품들에 나타나는 모습들, 특히 빅토리아 시대의 경향이 유별한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연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영국 여행을 갔을 때 하늘에서 내려다 보았던 영국의 기복 없는 들판과 숲들, 소택지. 한국의 산이 많은 지형에 익숙하다면 일견 심심해 보일 수 있는 그 풍경들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비단 이 작품이 아니어도, 영국의 작품들이 다루고 있는 그 풍경들 말이죠. 제게 분명 아득한 먼나라의 풍경일 것이, 오랫동안 책을 읽으며 그려왔기 때문에 제 것 인양 익숙하게 느껴져요.

톰은 동생이 홍역에 걸려 잠시간 이모네 집으로 대피해 있어야 하는 상황인데요, 이모는 상냥하고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이모부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면이 있지만 나쁜 구석은 없는 평범한 사나이입니다. 톰은 심심한 이모네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지루해서 몸서리 칩니다.

이모네는 큰 저택을 개조하여 셋집을 여러 개 만든 중 하나에 살고 있어요. 이 집 현관에는 커다란 괘종시계가 하나 있습니다. 시간은 잘 맞는데 괘종을 울릴 때는 영 엉터리로 울리는 이상한 시계예요. 톰은 이 시계를 확인하러 갔다가, 자정이 지나 괘종이 열세 번 울릴 때 뒷문을 통해 신기한 정원으로 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잘 가꿔진 정원에 대한 묘사와 소년이 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면서 저도 기분이 좋아졌어요.

환상의 정원으로 들어갈 때, 톰은 자신이 원하는 시간을 결정할 수가 없어요. 그저 펼쳐지는 대로 즐기는 수 밖에 없죠. 이 환상 속에서 톰을 알아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 해티는 때로는 톰보다 어리고 때로는 톰보다 나이가 많아요. 이야기는 톰의 시각에서 그려지지만, 톰의 몇 주가 해티에게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유년기가 끝날 때까지의 긴 시간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시간 여행자의 아내》를 떠올렸어요.

《시간 여행자의 아내》 역시, 대부분의 내용이 남자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지만, 매우 긴 시간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건 아내 쪽이었죠. 외로운 소녀 해티가 침착한 목소리로, “오지 않은 건 너”라고 말할 때의 슬픔이란……. 올 수 없었던 것이 톰의 잘못이 아니라 해도, 긴 시간을 견뎌야 했던 건 해티였죠. 동화다운 결말을 맺은 이야기이지만 그 해티의 외로움 때문에 마냥 즐거운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는 이야기였어요.

덧글

  • RNarsis 2012/08/20 22:48 # 답글

    정말 좋아하는 책입니다.
  • sirocco 2012/08/22 23:33 #

    어렸을 때 보았다면 저도 정말 좋아했을 것 같아요. 지금도 좋지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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