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팬》, 오리지널이 없는 시대

첫 페이지를 읽자마자 내가 피터팬 원작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피터팬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이들은 누구나 자라게 마련이다. 단 한 아이만 제외하고 말이다. 아이들은 일찍부터 자신들이 자라서 곧 어른이 되리라는 걸 알게 된다. 웬디도 다음과 같은 경위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All children, except one, grow up. They soon know that they will grow up, and the way Wendy knew was this.

첫 화의 제목은 피터팬이 나타났다! Peter Breaks Through

최초의 원작 무삭제 완역판이라고 자랑하지 않는 걸 보면 이전에 완역판이 나온 적 있나 보다. 어쨌든 나 역시 이날까지 살면서 원작 피터팬을 읽어야 한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다.

피터팬 같이 원작이 너무나 유명해지면 여러 차례 재생산되고 복제되어 원작이 아예 유리처럼 투명하고 얇은 존재가 되는 일이 생긴다. 나는 지금 이 자리를 빌어서 쉽게 간과한 위대한 원작들 앞에 무릎을 꿇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원작을 본 적 없이 진짜 원작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때로 어떤 책은 큰 출판사에서 나오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데, 이런 면에서 김영사가 피터팬을 내놓은 건 굉장히 즐거운 일이다. 내 피터팬은 1쇄 4판인데 아직도 돌아온 피터팬과 묶어서 판다. 얼마 정도의 물량을 두 권으로 묶어서 파는지 모르겠지만 한 권 값으로 두 권 파는 건 큰 출판사가 아니면 못할 일이다. 한정 이벤트라고 하는데 언제까지 한정인지는 출판사 관계자 말고는 아무도 모르니 살 생각이 있으면 어서 사라.

너무 소녀 취향이 아닌가 싶기는 한데 일러스트도 양질이다. 컬러도 나쁘지 않은 편이고, 안쪽에 검은 실루엣 피터팬이 특히 예쁘다. 악어도 몹시 깜찍.

읽어보면 제임스 매튜 배리도 루이스 캐롤 못지 않게 뭔가 포스가 느껴지는 인간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이게 맨 정신으론 이런 걸 못 쓰는데 그렇다고 피터팬의 화신 그 자체인가 생각해 보면 엄청나게 캐릭터를 꿰뚫어 보고 있어서 그럴 것 같지도 않고 어떤 의미에서 상당히 동인남 같은 풍모를 지니고 있어서 조금 섬짓 하기도 하다. (…특히 후크에 보이는 집착은 우리가 흔히 알아온 것과 다르다.)

원작에서는 애니매이션이나 뮤지컬 등에서는 대폭 축소되는 달링부인과 달링씨의 비중이 제법 있는 편. 마치 엑스트라로 취급되는 개 나나도 매우 중요한 캐릭터다. 달링부인에 비해 달링씨가 다소 악의적으로 그려진 것은 “네버랜드를 찾아서”를 보시면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원작을 읽어보면 원작을 뛰어넘는 리메이크는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리메이크를 할 때 물론 원작의 감옥에서 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도 일부 존재하겠지만, 원작이 그 자체로 빈틈없이 잘 짜여 있어서 손을 대기 난감해지는 경우도 있다. 피터팬이 바로 후자다. 피터팬 자체가 클베(주1)를 여러 번 거친 후(웃음)에 완성되었기 때문에 시나리오적으로 상당히 안정적이다. 여기에다 뭔가 더 넣고 빼기 애매한 것이 사실이다. 제임스 매튜 배리가 피터팬을 한 권으로 끝낸 이유다. 그토록 많은 속편들이 실패하는 이유다.

제임스 매튜 배리를 읽어라. 1900년대의 소년 소녀를 지배한 이야기의 오리지널을 읽어라. 진짜를 읽어라.



주1) 온라인 게임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이용자에게 공개하여 테스트를 하는 행위를 클로즈 베타(Closed beta)라고 한다. 보통 여기까지 가면 빼도 박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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